열 살에 아버지를 여읜 나로서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지 않다. 나의 아버지는 친구들을 참 좋아하셨다. 한 해의 결실을 거둬들이는 날 바깥마당에 수북 쌓인 볏섬들과 그중 절반이나 이런 저런 명목으로 몇 대의 우마차에 실려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숨지으시던 모습, 아버지가 예비군 훈련 중에 집에 가지고 오신 목총을 신기하게 가지고 놀던 일, 기분이 좋을 때면 흥얼거리시던 ‘무주구천동’가락이 지금도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사실 아버지에 대한 글을 이렇게 써보기도 처음이다. 아버지는 우리 면의 모내기 대표선수로 나가실 만큼 농사일도 잘 하셨다. 궂은 날이면 친구들을 집에 불러서 술자리를 하시고, 엄마는 부엌에서 면도가 약간 덜된 돼지고기를 비계 채 숭숭 썰어 넣어 김치찌개를 끓여 안주로 내오셨다. 비오는 어느 초여름 오전, 아버지 친구분들이 다시 우리집으로 모여드셨다. 한분이 내가 아끼던 흰둥이를 밖으로 끌고 나가려 하셨다. 나는 달려들어서 흰둥이를 구출하여 뒷산으로 도망가서 몇 시간이고 흥분한 마음을 삭히고 내려왔다. 오후가 되자 비가 개었고, 친구들과 밖에 나가서 한참을 놀다 들어와 보니, 그 사이에 아버지 친구들이 다시 다녀가셨다. 그날 이후에 흰둥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참 좋아하셨다. 초등학교 들어갈 때쯤이라고 생각된다. 아버지는 장날이면 몇 가지 야채를 마차에 싣고 읍내 장에 가셔서 팔고 술한잔 하고, 서점에 들러서 아들에게 줄 책을 사다주곤 하셨다. 아버지는 아들이 책을 읽는 것을 참 좋아하셨다. 한번은 혼자서 들을 수 없을 만큼 두껍고 무거운 책 한권을 사오셨다. 표지가 떨어져나간 중고 백과사전이었지만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두껍고 무거운 책, 오랫동안 곁에 두고 읽고 또 읽었던 책으로서, 호롱불 켜고 사는 시골 소년으로서 접할 수 없는 넓은 세상의 일들을 처음 가르쳐준 소중한 선물이었다. 처음 나오는 단어는 소련 최초의 우주인 ‘가가린’의 이야기였다. 그가 어떻게 우주선을 타고 대기권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왔는지, 또 기억에 남는 것은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이라는 희한한 이름이었다. 이런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사진과 함께 백과사전에 나오는 인물이 됐을까? 그것이 대단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해마다 학기말이면 아버지는 고기 몇 근과 대병짜리 소주 한 병을 가지고 학교를 다녀가셨다. 그런 날이면 선생님들이 모두 기분이 좋아지셨다. 학기말에 선생님들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러 다녀가시는 날이면 술기운이 넉넉하게 남아서 집에 돌아오셔서는 나에게 “참 잘했다”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내가 매년 우등상 받는 것을 참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시골 농부였지만 교제의 폭이 넓으셨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담임선생님이 나를 따로 부르셔서 가보니 “네 아버지가 아무개냐?”라고 물으시더니, “내가 네 아버지 친구다” 이 말씀에 나는 눈물이 날 뻔했다. 아버지는 내가 열 살 때 돌아가셔서 그때쯤에는 아픔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았는데 5년이나 지나서 난데없이 등장하신 담임선생님이 “내가 네 아버지 친구다, 공부 열심히 해라” 말씀하시는데 선생님 얼굴과 아버지의 얼굴이 중첩되면서 나도 모르게 갑자기 눈 주위가 따뜻해지던 일이 생각난다.
이만하면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꽤나 많은 것 같지만 모두 실상은 열 살 이전의 아련한 기억일 뿐이다. 나는 어떤 아버지로 기억될까 궁금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