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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신원섭 [ E-mail ]
  창28:10-22 하늘 사다리. 2017.10.15.
  

창28:10-22 하늘 사다리. 2017.10.15.주일
더 행복해지기 위해 한 일인데 오히려 행복해지기보다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고생하는 일이 있다. 야곱은 열심히, 치열하게, 경쟁 속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하고, 심지어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 형과도 경쟁하면서 우위를 점하고 산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얻은 ‘장자’라는 명분이 오히려 그에게 해가 되고 말았다. 전에는 두 다리 뻗고 편히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살았는데 이제 먼 길을 도망가고 있다. 왜 도망가는가? 형이 무서워서. 더 좋은 것을 택하려고 선택하고 아등바등 했던 인생인데 오히려 더 불행하고 힘들어졌다.
그래서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거기서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를 삼고 거기 누웠다. 잠자리로서 적합하지 않은 노천에서 잠을 청하고 있다. 야곱의 목적지 하란은 브엘세바로부터 약 8백km 정도 되는 먼 거리이다. 하루에 백리 40km씩 20일을 걸어야 갈 수 있는 거리이다.
야곱의 인생에서 두 가지 전환점이 있는데 모두 형에 대한 두려움과 관계가 있다. 본문은 첫 번째 전환점이다. 형이 사람을 풀어서 쫓아올지도 모르니까 빨리 더 도망가야 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주셨다. 두 번째 전환점은 약20년이 지나고, 32장에서 야곱이 다시 하란에서 고향으로 돌아올 때였다. 식솔과 재물을 이끌고 먼 길을 지나 가나안 초입에 거의 다 왔는데 또 다시 형에 대한 두려움이 가로막는다. 그 동안 형과 화해한 적이 없다. 그러니 얍복강 나루터에서 두려워서 건너가지 못하고 있다. 형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그때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셨다.
인생에 어려움을 만날 때, 그것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어려움을 통해서 내 옆구리를 쳐서 깊이 잠든 영혼을 깨우시는 것이다. 그러면 이전과 이후가 변화된다. 첫째, 영적으로 눈을 뜨기 전에는 야곱의 신세는 그냥 도망자이다. 그런데 벧엘의 하나님을 만난 후에 그의 길은 평안한 길이 된다. 그는 이제 믿음의 길, 순례의 길을 가게 되었다. 주님을 새롭게 만난 후에는 똑같은 광야 길을 가더라도, 그 길은 더 이상 과거로부터 도망가는 길이 아니라 미래를 향하여 가는 길이 된다. 과거에 얽매여서 내가 저질렀던 어떤 잘못들이 또 나의 실수를 드러내고, 수치스럽게 만들고, 힘들게 만들면 어떡하나. 그런 두려움에만 얽매이는 삶은 아직 벧엘을 만나지 못한 삶이다. 하나님을 만나면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주신다. 이제 가는 길일 도망가는 길이 아니라 새로운 일을 계획해 놓으신 소망을 가지고 가는 길이 된다.
둘째, 영적으로 눈을 뜨고 보니 여기가 하나님이 계신 곳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냥 잘 데가 없어서 찬이슬 맞으면 잔 것인데, 16절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야곱이 잠에서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 사실을 깨닫고는 베고 자던 돌을 세워 기둥을 만들어 기름을 붓고, 기름 부어드리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셋째, 그의 일상이 변화된다. 그저 어제와 오늘이 변화 없고, 내일도 찬이슬 맞으며 잠을 자고, 또 뜨거운 태양 아래 터벅터벅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일상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적의 현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과거에 얽매이는 삶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달려가게 되었다.
이제 오늘 이 예배가 벧엘의 경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리고 나면 말씀을 통해서,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생각해주시는구나.’ 나는 과거에 얽매여서 실패에 얽매여, 과거의 죄악과 수치에 얽매여서 자신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치스러운 인간을 찾아오시고 만나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야곱이 보니 하나님의 사닥다리가 하늘과 땅이 연결되어 있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꼭대기에 보니까 하나님이 서 계신다. 그리고 13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호와니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네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많아지고, 동서남북,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겠다. 너를 이끌어주겠다.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결코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복을 주시고, 안전을 보장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가!미국 핵추진 항공모함만 한 척 부산항에 들어와도 힘이 된다. 야곱의 인생은 이 체험 이전과 이후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
하나님을 만나면 일상이 기적의 현장으로 변한다. 아내가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보이고, 남편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사람이 된다. 속 썩이는 자녀도 가장 소중한 유산으로 보인다. 똑같은 일상인데 영적인 누을 뜨고 보면 감사가 가득한 광주리가 된다. 그것을 사모하세요. 하나님에게 뭘 새로운 것을 달라고 하시기 전에 이미 주신 일상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기적은 이미 일상 속에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을 기적으로 보지 못하는 우리의 눈이 문제다. 똑같은 환경을 맞이하더라도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다.

땅과 하늘이 연결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가지고 내려오고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가지고 올라가고. 이런 놀라운 광경을 본 이후에 야곱의 인생은 이론적인 신앙, 지식적인 신앙이 아니라 체험적인 신앙이 되었다. 그런 믿음의 단계를 사다리 올라가듯이 매일매일 올라가기를 사모합시다.
이렇게 하나님은 벧엘에서 야곱에게 무조건적인 축복을 약속해주신다. “네가 이렇게 하면 이것을 주겟다. 네가 하는 것을 봐서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다” 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땅도, 후손도, 평생에 보호하심도, 아무 조건없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런데 20절에 보면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하면서 조건을 얼마나 많이 가져다 붙이나 보라. 이르되,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하나님이 이미 그렇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뭐가 “하시오면”인가? 우리는 이렇게 쓸데없는 기도를 할 적이 많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아멘”으로 받으면 되는데, 거기서 또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한다.
우리가 야곱의 축복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 가지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첫 번째, 야곱처럼 사기치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빼앗으면 그것이 내 것이 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할 수 있으면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는 것이 더 큰 복이다. 야곱이 형과 계속 사이 좋게 지냈으면 오히려 형이 미안해 하면서 생활비도 대고, 고기도 철철이 사냥해서 보내면서 결국 자신이 언약의 계승자가 될 것이었다. 만일 야곱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야곱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되는구나.’ 이것이 첫 번째 오해다.
두 번째 오해는, ‘역시 하나님도 그렇게 하면 축복해주시는구나. 그렇게 안 했으면 장자권이 꼼짝없이 에서에게 갈 뻔했구나. 야곱과 리브가가 그렇게 반칙을 하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뜻도 수포로 돌아갈 뻔 했구나. 그러니까 야곱처럼 이렇게 하는 것이 맞구나.’ 그게 아니다. 이것은 원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지 하나님이 반칙을 인정해주신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우리 인생에 과오가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내가 그래도 너를 끝까지 지켜주고, 네가 바른 길을 가고, 나의 뜻대로 향하기를 원하노라.” 말씀하실 때 가룟 유다처럼 끝까지 고집부리면서, “아닙니다. 하나님. 나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이렇게 자학하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가장 심각한 모욕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더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며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인다. 베드로는 제자의 지위를 회복하여 초대교회 사도행전의 주요인물로 활약하고 있지 않습니까? 유다의 행위는 사무라이 세계에서 보면 남자답고 멋있고, 명예로운 것이라고 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면 가장 교만한 행위이다.
우리는 내 죄값을 치르며 사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점점 덜 넘어지려고 애쓰는 삶이다. 그러면서 그 믿음이 점차 성장하게 된다. 그러다가 또 넘어지고 또 거기에서부터 또 다시 일어나 털고 열심히 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이 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다른 점이다. 기독교 신앙은 은혜의 신앙입니다. 다른 종교들의 신앙생활은 값지불의 신앙이다. 그러니까 갈 수가 없다.(계속)

[인쇄하기] 2017-10-31 21:2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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