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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신원섭 [ E-mail ]
  창세기37:1-11요셉과 예수님 2017.11.26.주일
  

요셉의 별명은 “예수님의 미리보기”(예표)이다. 예수님의 지상생활 삼 년 가운데 그분의 삶의 모습 속에서 흠잡을 것이 없다. 요셉의 생애도 실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보기가 어렵다. 요셉은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사람이었고, 아버지를 사랑하고 매사에 순종하며, 그렇기 때문에 헤브론에서 세겜까지 80km도 넘는 거리를 다녀오라는 말에도 두 말 없이 순종한다. 예수님의 성품과 많이 닮았다.
6절)어느날 요셉이 꿈을 꾸었다. 형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곡식단을 향해 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이 말을 하면서 요셉은 “들어보라(힌네)는 말을 세 번 반복한다. 형들의 주의 집중을 요구하는 말이다. 그리고 9절에서 두 번째 꿈 이야기를 할 때도 그 말을 두 번이나 더 한다. 요셉은 이런 꿈 이야기가 형들을 불쾌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의식이 없다. 즉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지만 요셉은 형들을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했다. 
그 꿈은 하나님이 꾸게 해주신 것이지 요셉이 형들에게 자랑할 마음으로 의도적으로  꾼 것은 아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요셉의 삶이 꿈과 정반대로 진행되고 있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해피앤딩이지만 17세부터 30세 까지 노예로 팔려가고, 죄수가 되어 옥고를 치르기까지 많은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형들이 요셉을 미워한 증거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야곱은 총애하는 아들 요셉을 정실부인인 레아가 낳은 아들들에게 맡기지 않고 여종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에게 붙여주었다(2절). 야곱이 라헬을 총애했기 때문에 레아의 아들들은 어린 동생 요셉을 도와주지 않았을 것이다.
4절에도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즉 ‘안녕’(샬롬)이라는 인사말조차 건네지 않았다는 말이다. 형들에게 요셉은 싫어버린 바 되었다. 형들은 요셉을 형제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형들이 듣기에 불쾌한 꿈 이야기를 연거푸 두 번이나 이야기하니까 그를 더 미워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도 그것을 우려하여 요셉을 꾸짖었을 것이다. 꿈의 내용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렇게 눈치 없이 해몽이 뻔한 꿈 이야기를 형들에게 발설했다는 자체를 꾸짖은 것이다. 11절에 형들은 요셉을 더 미워하게 되었지만 야곱은 요셉의 그 꿈을 마음에 간직해 두었다. 아버지는 왜 이 못마땅한 꿈을 마음에 두고 있었을까?야곱의 마음에는 요셉의 이 꿈이 어떻게 성취될까에 대한 기대가 있다. 야곱은 벧엘의 언약, 하란에서의 축복, 얍복강 나루터에서의 씨름, 형과의 극적 화해, 세겜에서의 안전보장 등,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요셉의 꿈을 가볍게 흘려버리지 않은 것이다.
성경에는 질투의 사례들이 나온다. 가인이 아벨을 질투하고(창4장), 사울이 사위 다윗을 질투했다(삼상18장), 그리고 복음서에서는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질투했다(마27장).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을 질투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생명과 같이 사랑했다(삼상 18:1-4).요나단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길래 골리앗의 목을 베어가지고 온 다윗을 보고서 시기하지 않고 그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요나단은 이 사건을 다윗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질투해야 하는데 질투하지 않은 사람이 또 한 명 있다. 요3:30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의 제자들이 와서 예수가 요단강에서 사람들을 침례를 주는데 인파가 엄청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랬더니 요한이 대답한 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면서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낸다. 그게 안드레와 요한이다. 그는 어떻게 예수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출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역사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의 이 일을 통해서 형들의 질투가 발동되었는데 형들은 이 일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우리는 육신의 관점에서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생각하면 시기와 질투를 피할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은 교회가 부흥하고 나라가 부강해지는 것은 관심이 없다. 오직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 바로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사람이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까지는 아무 문제없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이 십자가를 자기도 져야할 것 같다. 그래서 배신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지만 제자들은 그래도 상당히 헌신된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배를 버려두고, 생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런데 그러다가 결국에 가서는 자기들도 십자가를 지게 될 것 같으니까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난다.
요셉도 마찬가지이다. 이 상황에 하나님이 그에게 꿈을 주셨는데 이 꿈 때문에 요셉은 안 좋은 일을 경험한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간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보이사.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벧전2:20).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십자가의 길을 따라오라고 하신다.

요셉의 인생과 같이 예수님을 잘 따라가면 해피앤딩이 준비되어 있다는 공식으로 생각하면 크게 실망할 수 있다. 요셉처럼 일이 다 잘 되면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우리 인생에 실망할 일이 많다. 왜냐? 예수님도, 사도들도, 스데반 집사도 순교했다. 그들이 왜 죽었나? 꿈 때문에 주님이 그들에게 주신 꿈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를 안 믿고 대충 사는 것이 나은가. 그러나 대 반전은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가장 큰 형통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자들에게 인생 중에 좋은 결말들을 보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더러는 하나님께서 이 순교자들의 선지자들의 삶이 비극적으로 인간적으로 볼 때는 불행한 모습으로 끝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런 삶으로 마무리 되는 경우도 있다는 가능성도 열어놓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일이 잘 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고 잘 안 되면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좌절하는 것은 너무 근시안적이다. 긴 안목으로 죽음 너머 천국까지 우리의 일생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환경과 관계 없이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누구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아도 좋다. 그런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오늘은 예수님의 미리보기로서의 요셉의 삶의 모습을 나눠보았다. 베드로 사도는 말한다. “이를 위하여 너희도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주신 것같이 너희도 그의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20)
아무쪼록 인생에 성실하고 순수하게 따라가다가 요셉과 같이 행복한 결말을 맞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결말이 아니라 할지라도 천국에 가서 믿음이 인정받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인쇄하기] 2017-12-23 16:2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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