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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

  신원섭 [ E-mail ]
  히9:7-15양심아 날 살려라17.3.5
  

제목: 양심아 날 살려라   본문: 히브리서 9:7-15
뇌물과 헌금의 차이점: 뇌물은 감사하는 마음은 필요하지 않고, 비밀만 유지하면 된다. 액수는 클수록 좋다. 그러나 하나님은 뇌물은 받지 않으신다. 헌금함에 집어 넣을 수 있겠지만 받지 않으신다. 딤전3:8“...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고후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본문 말씀은 광야에서 제사하던 성막을 비유로 이야기한다. 그것이 예배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앞에 나오는 8:5, 9:23등에 나오듯이 본체나 실체가 아니고 모형이다. 본체의 그림자요, 현재까지의 비유이다(9:9).마치 여자를 꽃과 같다면 사람이 꽃이라는 말이 아니라 여자의 어떤 특성을 비유한 것이다. 비유되는 대상을 ‘유비(類比) 또는 아날로지(analogy)라고 한다. 비유(比喩)는 빗대어 말하는 행위를 말한다. 
성막의 모든 기물과 거기서 제사를 드리는 모든 속죄의 과정은 실체가 오기 전까지의 비유였다. 그러면 실체는 무엇인가? 모든 식양과 제의를 한 몸에 완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모든 것이 합하여서 무엇을 상징한다고? 예수 그리스도.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본체고, 이 성막은 비유와 상징과 그림자, 모형이다. 진짜가 아니고 진짜가 오기까지 임시용이었던 것이다.
9:10에 보면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라. '개혁'이란 이제는 예수만 믿으면 번거로운 절차를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을 말한다. 제사를 계속 반복한 이유는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년에 드린 속죄제가 효력이 끝났으니까 다시 바쳐야 한다. 구약의 제사는 이렇게 반복해야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한번 죽어서 모든 사람이 영원토록 다시 제사 드릴 필요가 없는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 이것이 10절에서 말하는 개혁이다.
9절) 매번 반복하는 이 제사로는 번거롭기만 하고 실질적으로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내 죄를 깨끗하게 하셨고, 내 양심까지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그 최종적 목적에 대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라고 강조하신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양심은 어떤 형편인가?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는 그리스도를 결코 영접하지 않는 방이 있다. 입구에 “접근금지”, 심지어 예수님도 못 들어오신다. 아직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들이지 않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까지 들어오셔야 한다. 그래야 그의 피가 내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해주신다(참고: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IVP소책자).
천당 가고, 복 받으면 좋으니까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배우자도, 자녀도,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방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양심은 내 체면의 최후의 보루이다. 그러면서도 다급하면 ‘양심을 걸고 맹세’하기도 하고, 누가 잘못하면 ‘저 사람이 양심이 없다’고 말한다.
주님이 그렇게 온전하고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주셨는데, 내가 양심을 열어드리지 않으면 나는 온전히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양심이 항상 떳떳하지 않다. 양심이 항상 문제가 된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데 열어드리지 못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주님의 최종목표는 나의 양심까지도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해주시는 것이다(14절b).
여러분 반대로 뒤집어 생각해봅시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왜 섬기지 못하는가? 왜 예배에 와서  은혜를 받지 못하나? 집단적으로는 은혜를 받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감동이 없는가?. 그래서 더 큰 교회에 사람이 몰린다. 분위기에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집에 혼자 가 있으면 여전히 내 양심은 오징어 먹물 같은 것이 남아 있다. 주님 앞에 열어드리지 못한 영역이 있으면 실질적으로는 그것이 나를 지배한다. 그러니까 14절 마지막 부분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집단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무리에게 말씀하시지만 구원은 한 사람씩 받는 것이다. 그래서 양심이 문제입니다. 양심을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으면 온전히 드리지 않은 것이다. 양심은 내 마음의 중심이다. 유대교신앙과 예수를 믿는 신앙은 여기서 차이가 난다.
형식주의는 사람을 죽인다. 구약의 언약은 돌판에 새겨주셨지만, 새 언약은 내 마음판에 새겨주셔서 항상 생각나게 해주신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양심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의 유대교의 제사는 예법이 얼마나 번거로운가?  아무 때나 안 되고, 정해진 장소, 시기, 제물, 방식, 그래서 9:1 에서 섬기는 예법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이 지으신 가장 아름답고, 깨끗하고, 존귀한 모습으로 바꾸어주신다. 일자무식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사람들이 총체적으로 더 거룩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하나님은 뇌물을 요구하지 않고, 단지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오라고 하신다. 그것이 양심이다. 양심은 형식, 의식과 상관없는 내면의 중심이다.
사자성어 중에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을 말한다.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려면 자기도 노력해야 한다. 그것을 보고 어미가 밖에서 돕는다. 동시에 안팎에서 협력이 이루어진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한 번도 열어드린 적이 없던 양심에 예수님을 모셔들이시라. 그러면 그때부터 신앙생활이 제대로 작동한다 왜 예수님을 믿는 것 같은데 능력이 나타나지 않나?
양심을 가면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나의 신앙생활이 왜 이렇게 힘들고 잘 안 되나? 주님께서는 그 보혈이 나의 죽은 행실까지 살린다고 하시는데,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해준다는데 왜 이런가? 이제 이 양심을 하나님 앞에 내어드리면 그때부터 비로소 부르심을 받은 자가 되어 영원한 약속을 천국을 누리시라. 단언코 양심 속에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우리의 썩고 곰팡이 난 양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오셔야 한다. 아직 머리로만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의 심령 속에 감추어져 있는 양심에 주님을 모시기 바랍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이게 누구에게 주신 말씀인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이다. 왜 교회에게 이런 말씀을 하실까? 우리는 불신자 전도할 때 쓰지 않나? 믿는 자들에게 먼저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이 마음 밖에서 두드리고 계신다고 합니다. 양심을 열어드리지 않은 것이다.
양심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맛을 못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시간 양심을 주님께 내어드립시다. 다시는 걸어 잠그지 말고, 다시는 가면으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당신을 위한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아직 양심에 가로막혀 들어가지 못하고 계십니다.
주님, 나의 양심을 지배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서로에게 양심을 내어맡길 수 있을 만큼 교회가 성숙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대제사장을 통하여 드려지는 대리 제사가 아니라 내 양심에 주님을 모시는 친밀한 관계입니다.

[인쇄하기] 2017-03-14 19:3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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